내가 바라는 우리 마을 통장님
내가 바라는 우리 마을 통장님
휴일이다. 게으른 아침잠을 푹 자고 일어나 창밖에서 밀려오는 따스한 봄 햇살을 바라본다. 이런 포근한 날에는 부지런히 일어나서 며칠 전 심어 두었던 상추 모종에 물도 주고 싶고, 몇 가지 없는 빨랫감들도 어서 빨아 널고 싶다.
지난 주, 오랜만에 수원 본가에 다녀왔다. 이번에 새 직장에 들어가게 되는 동생을 축하해 준다며 부모님 댁 근처에 신혼집을 마련한 언니는 자신이 몇 번 입지 않았던 도톰한 니트들과 봄 코트, 악세사리, 핸드백 등을 바리바리 챙겨 왔다.
언니는 어릴때부터 쇼핑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다. 그래서 덕분에 나는 굳이 힘든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언니로부터 물려받은 예쁜 옷들이 계절별로 항상 넉넉했다. 물론 대학생이 되어서는 언니 옷을 몰래 훔쳐 입고 나간 적이 종종 있어 가끔 육탄전을 벌이기도 했었지만.
나와는 세 살 터울의 언니는 쇼핑을 하면서도 항상 가족을 생각했었다. 내가 초등학생 2학년 즈음, 언니는 겨우 5학년이었었는데, 어느 추운 겨울날, 언니가 내 생일 선물이라며 새빨간 털 벙어리 장갑을 사준 적이 있었다. 생일 선물이라는 것도 낯설었지만, 언니의 따뜻한 마음에 더욱 감동하여 난 지금도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 언니는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당시 같은 권선구였지만 차로 10분 정도 이동해야하는 거리로 다녔기 때문에 언니는 노란색 통학용 봉고차를 타고 다녔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등교를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조용한 아침 등굣길의 풍경을 ‘쨍’하고 깨는 소리가 들려와 반사적으로 그쪽을 쳐다보게 되었다.
“야! 최똥정! ”
우리 학교에서 언니가 다니던 중학교를 거쳐 가는 길에는 넓은 교차로가 있는데 그 교차로의 신호를 받고 지나가는 한 노란색 봉고 차 안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봉고차 창문을 열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언니가 날보고 웃고 있었고, 그 봉고차는 신호가 막 바뀌려고 하는 찰나 교차로를 빠르게 통과해 나갔다. 언니의 그런 장난기 많은 모습에 난 속으로 ‘아, 저 푼수..’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언니가 참 귀엽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 저녁 식사에서 아버지께서는 손수 닭백숙을 고와 주셨고, 결혼을 이유로 서울로 나가 있는 남동생도, 본가 주변에 터를 잡은 언니네 부부도 다 모인 즐거운 저녁식사 시간, 언니는 며칠 전 동네 통장 선거에 면접을 보러 다녀왔다고 했다.
“아빠, 내가 수원 시장이 몇 선인지 어떻게 알아. 우리 동 인구수는 또 어떻게 알고..”
예상치 못한 질문들에 언니는 속으로 당선이 되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며칠 전, 언니는 당선이 되지 않았다고 소식을 보내왔다.
언니가 동네 통장을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난 처음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가 생각하는 마을 통장님의 모습은 자녀들의 학령기를 거의 보내고 그제서야 조금 일상에 시간이 남는 이웃 아주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으며, 그 자리는 마을의 잡다한 일들을 처리해주고 희생 봉사하는 정도, 그리고 보수 또한 서울과 수원에서 오랜 시간 어학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언니의 보수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난 결국 나만의 해답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언니는 40대가 되어도 언니의 고향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그 땅에서 숨쉬는 모든 순간순간들이 언니와의 추억이 되어 그곳에서 울고 웃으며 큰 위로와 안락함을 느끼고 있던 것 아니었을까.’였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입주한 대단지 아파트의 동장으로도 선뜻 지원하였고, 더 나아가 동네의 통장으로까지 지원하여 각 타지들에서 혹은 다른 동네에서 결국 이 동네로 안착한 이웃들을 진심으로 보살피고 이끌어주며 우리 마을을 더 살기 좋은 방향으로 예쁘게 가꾸어 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 그녀의 고향을 사랑하는 이런 마음이 수원 시장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정치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지, 학벌은 어디인지, 현재 동네의 주민들이 몇 명 살고 있는지 등의 누구나 인터넷으로 몇 번 검색만 해도 나올법한 정보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마을의 총괄 봉사자로 흔쾌히 자원하여 자신있게 면접까지 보러 나가게 된 촉매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마흔이 된 현재까지도 함께 숨을 쉬고 있는 그 마을을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더욱 더 발전되기를 원하며 우리 가족, 우리 마을, 우리 고향을 더욱 행복한 방향으로 적극 관여, 개입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차려주신 맛있는 닭백숙을 배부르게 다 먹은 후, 나는 다시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 왔다. 성인이 되자마자 타지 생활을 해 온 나는 수원을 떠올리면 ‘내가 태어나 학창시절까지 보냈었던 곳, 가난으로 시작하여 우리 3남매를 성인까지 잘 보살펴주셨던, 이제는 그때보다 조금 노쇠해지신 부모님이 계신 곳, 서울에서 혼자 살며 용돈이 부족하면 언제든지 손 벌리라며 일 년에 여러 번 생활비를 보태어주는 든든한 언니가 있는 곳, 그리고 고향도 회사도 아무 연고가 없는 형부까지 정착하게 만든 곳,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항상 응원을 보내주고 싶은 경기도 수원시. 특히 우리 동네.’ 라고 정의하고 싶다.
비단 국가의 행정뿐만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동네, 우리 마을의 관리에 있어서 앞으로의 세대 풍조는 혈연, 지연, 학연 나아가 그동안 공공연하게 있어 왔던 정치와 선거 운동에 부정부패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을 법한 정치적인 성향들은 끊어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번 통장 선거 면접 질의 안에는 시장의 정치적인 성향을 묻는 듯한 질의나 전입신고도 하지 않은 이웃들 혹은 다양한 상황들에 처해 전입신고를 하지 못한 주민들의 상황을 간과할 수 있는 변형 가능 수치, 행정적인 부분들을 묻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현재의 우리 마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나 앞으로의 포부, 지원 동기 등을 면접시에 비중있게 다루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의 수원에는 특례시답게 많은 주거지들이 우후죽순 개발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생겨날 것이다. 아마 많은 신혼부부들 혹은 1인 가구들이 주된 이웃들로 자리를 잡아갈 확률이 크다. 그런 면에서 우리 동네 통장은 그런 젊은 세대와 소통이 가능한, 그리고 정치적인 연고가 없어 중립적인 성향을 가져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할 수 있는 포용력을 가진, 그리고 내가 사는 이 땅에 대한, 이웃들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기반으로 둔 봉사자가 당선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자세의 사람이라면 우리 동네를 맡겨도 안심이 될 것이다.
사랑은 정치를 이긴다.
2023년 봄, 서울에서 나의 동네 수원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