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증원: 시작은 살려달란 호소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얼마 전까지 모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환자입니다. 최근에 의료대란 사태가 터지면서 일개 환자의 입장으로서 심란해져서 안 보던 뉴스를 자주 찾아보게 되더랍니다. 덕분에 현안에 대해 여러 의견들을 찾아보면서 배우게 되는 점들도 많기도 했습니다.
이제 전공의 복귀 마지막 시한인 5월 20일이네요. 작년 입원 기간 동안 많은 간호사님, 조무원님, 의사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았고 덕에 증세가 많이 호전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컸는데, 이번 사태 이후 그분들이 잘 지내실지 종종 염려되기도 합니다. 부디 무탈하시기를 바라며 조금은 비통한 심정으로 이 글을 써 봅니다.
현안에 대해서는 수많은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다고 합니다. 저도 이 점에 대해 수긍합니다. 환자들, 시민단체, 의사들, 간호사 및 의료 관련 직종 종사자들, 간호협회, 대학들, 병원협회 등등 수많은 집단의 이해가 얽혀있고 이들은 각개 추구하는 가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저 예시를 들자면, 누군가에게는 생사가, 누군가에게는 생계가, 누군가에게는 꿈과 비전이, 어느 쪽엔 존립 혹은 경영의 문제가, 또 어느 쪽엔 의료 산업 시장 자체의 주도권이 달려 있을 수도 있죠.
따라서 이번 갈등은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은 채 어느 한 집단에게만 모든 화살을 돌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여론에 반하는 행태를 보인다고 하여 악마화할 일은 더더욱 아니겠지요.
한 집단의 이익만이 달린 게 아니라 의료 시장과 관련된 집단 전체의, 그리고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국민들의 생명이 직접적으로 달린 일입니다. 각각의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의료 체계 자체의 판도가 줄줄이 바뀝니다. 그렇기에 현 정부가 강조하듯 모든 게 국민을 위함이었다면 그 판을 더 신중하게 해석하고 적절한 대안을 마련하였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시국에서 촌각을 다투는 것은 비단 전공의 복귀 시한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대 증원을 향한 외침은 의사 세력에 대한 공략이 아니라 살려달라는 호소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의사가 이기든, 정부가 이기든, 2000명을 증원하든 3000명을 증원하든 우리의 의견은 늘 한 목소리로 통일됩니다.
“살고 싶어요. 나와 내 사람들을 살려 주세요. 열악하지 않은 환경에서 안전하게 치료받고 싶어요.”
지금 당장 사는 게 바빠 현안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는 게 버거워 당장의 해결책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도, 이들에게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며 분노하는 사람들도 그 마음 앞에선 하나입니다. 이런 우리의 목소리는 분명 좌시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건, 그런 우리를 필사적으로 구하려던 이들의 목소리 역시 우리와 하나였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를 기억하십니까? 의료진들이 환자를 살려 보겠다고 열악한 환경도 마다하지 않고 발 벗고 나섰던 그 시기 말입니다.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있다면 수고를 치하하지는 못할망정 또 다른 희생을 강요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도 병원들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어 대규모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병원에선 다음 달부턴 급여를 지급할 여력이 없다, 이러다가 대학병원들이 줄줄이 도산될 거다 등의 절박한 목소리들도 쏟아져 나옵니다. 묵묵히 우리를 돌봐 주시던 간호사님들, 조무원님들, 그 외 의료계 직종을 종사하시는 분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들뿐만이 아닙니다. 의료진이 타격을 받는다면 한 체계가 줄줄이 무너지는 것이고, 그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것은 결국 환자들입니다. 의료계 직종 종사자들의 대량 실업 사태가 발생한다는 건 곧 병원들이 도산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고, 병원들이 도산할 위기에 처했다는 건 곧 환자들이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 역시 불안정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 정부를 향해 아래와 같은 질문들을 던지고 싶습니다.
지난 3개월간 전국적으로 비난받던 전공의들이 떠나고 침묵만 남은 이 시점에서 이제 환자들은 무어에 기대고 살아야 합니까? 간호사들에게 의사 업무까지 떠넘기는 PA간호법? 아니면 외국 의사 수입 제도?
이러한 임시방편책이 전공의들의 빈 자리를 메우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입니다. 미연의 사고가 발생할 것을 충분히 고려한 방책은 제시되어 있습니까?
국민은 늘 진실해지고자 여러 목소리를 냅니다. 그 목소리를 반영하고 국민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조율해나가는 것이 정부의 역할인 줄로 압니다. 국민이 있어야 국가가 있는 것입니다. 국민이 없다면 국가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부는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입니다. 정부가 제 쓸모를 다하지 못하는 시점은 곧 민중의 목소리가 호도되고 있는 시점이고, 이는 곧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다른 기구가 소임을 다해야 할 시점입니다.
정부를 정부답게 제동을 걸어야 함이 삼권 분립의 원칙 중 하나라면, 감히 묻건대, 사법부는 제 도리를 다하고 있습니까.
뜨거운 감자를 돌리듯 책임의 소지만 떠넘기고 있다면 결국 모든 후폭풍은 다시 국민에게 돌아오는 것 아닙니까. 정부가 산술적인 ‘근거가 미흡하다’는 오류를 범했다는 사실이 자명하다면, 이를 확실히 꾸짖지 않은 연유는 무엇입니까. 이로 인해 어느 한 체계가 도미노처럼 줄줄이 무너지는 경우 책임은 누가 집니까. 결국 국민입니까. 만약 우리가 피해를 입게 된다면 제대로 보상받을 수는 있습니까.
지난 5월 16일 의대 증원 집행정지 가처분 소송에 있어서 사법부에서 기각 결정을 내렸다고 들었습니다.
집행정지에 필요한 요건은 신청인의 적격 여부, 회복할 수 없는 손해 발생 우려로 집행정지를 긴급히 구할 필요성, 그리고 집행정지 시 공공복리에 중대한 우려가 없을 것, 이 3가지라고 하더군요.
공공복리란 건 공공의 행복과 이익을 뜻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렇기에 의대 증원에 대한 의료계의 반발과 공공복리가 정말 배치되는가에 대해 다시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의대 증원’과 관련된 안은 국민의 생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중차대한 사안입니다.
그렇기에 타당성을 충분히 검증하고 매우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합니다.
이미 의료 붕괴는 시작되었고, 대학병원들이 경영난을 겪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대학병원 줄도산이 머지 않았다고, 걷잡을 수 없어질 거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사태가 참사 수준의 국면에 접어든다면 이를 타개할 책임은 오롯이 국민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이 한계까지 내몰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미 진행되고 있는 의료 붕괴에 대한 적절한 수습이 필요합니다.
보건의료는 국민의 생명을 책임지고, 불가피한 재난 혹은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시스템이며, 수십 년에 걸쳐 발전해온 만큼 정교한 체계를 갖추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를 한꺼번에 뒤엎고자 한다면 부작용 역시 만만찮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 보았을 때 의대 증원 집행정지는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적 파장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일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의대 증원 집행정지 신청은 공공복리를 저해하는 일방적인 요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 싸움의 끝에는 도대체 무엇이 남습니까? 정부가 주장하는 공공복리가 남습니까? 의사의 악마 이미지와 의료 붕괴밖에 더 안 남지 않았습니까. 지금부터는 이미 시작한 의료 붕괴의 정도에 따른 수습이 가장 시급한 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대 증원 정책이 공공복리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정책인지 그 여부를 확실히 따져봄이 우선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디 이러한 점들을 참작하여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 국민의 이익을 위한 바른 목소리를 내주시길 바랍니다.
‘공공복리’를 위해, 현 의료 시스템의 붕괴를 대비하기 위해 누군가는 딴지를 걸어야 합니다. '사법부의 제동'이라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설치해야 합니다,
함께 목소리를 드높여 주세요.
2024/05/20
환자1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