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발자취
[ 이 생각은 2024년 06월 11일 시작되어 총 1명이 참여하였습니다. ]
공무원 특이민원 응대 요령 및 법적대응 요령 민원응대 직원교육
공무원 특이민원 응대 요령 및 법적대응 요령 민원응대 직원교육을 건의 합니다.

요즘 공무원에 대한 악성 민원이 증가함에 따라 민원담당 공무원의 보호가 필요 합니다.

이에 대해 악성 민원에 처했을때 피해 공무원이 취해야할 교육을 미리 받으면 대처가 더 적절할 것 같은데..

공무원 특이민원 응대 요령 및 법적대응 요령 민원응대 직원교육을 실시했으면 합니다.
  • 참여기간 : 2024-06-11~2024-06-25
  • 관련주제 : 교육>기타
  • 관련지역 : 전라남도>광양시
  • 그 : #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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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12

노동자 등골에 빨대 꽂는 것 빼고는 식자들이 한 일은 거의 없다. 빨대 꽂는 것은 노동자 단체들도 똑 같다. 결국 식자가 국민을 배부르게 할 수 있는 것은 유전을 개발하는 등 타고난 바탕에서 찾거나 특허 등 기술적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다. 아니면 전쟁 한 번 하지 않고 일본이나 중국 땅을 뺐는 것도 좋다. 필요에 따라서는 전쟁을 해도 된다. 아니면 원자력, TV, 선박, 반도체, 자동차, 비행기 등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여 그 권리를 국내로 가져오는 것인데 이런 것이 뭐가 있는가? 아니면 얼마나 있는가? 대부분 제조를 통해 외화를 벌어들였으니 노동이 만든 결과가 확실하다. 이렇게 배가 좀 부르니 노동의 땀 위에 숟가락을 놓는 것이 식자다. 확실한 통계로도 얼마든지 입증이 가능한데 식자들은 이를 빙빙 돌린다. 아무튼 이런 변경된 미군의 전략은 공무원을 통해 즉각적으로 각 마을에 전달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각 마을은 이를 즉각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 하겠으나 우리가 어디 그런 민족인가? 우리 역사의 공무원 중에 민초를 바라본 자가 있는가? 말단 공무원도 없다. 모두 군주나, 일본, 미군, 독재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 변경된 미군의 작전은 전달되지 못했고 혹 누군가 전달 했어도 국가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국민들은 따르지 않는다. 다시 말해, 미군은 흰색 옷을 입고 모여 있으면 공격하는 것이 작전이고, 마을 사람들은 알거나 모르거나 전쟁 중이라도 잔치는 한다는 신념이 충돌했다. 참으로 개탄스럽고도 어리석은 자들이 아닌가? 어느 날 미군은 조장 마을 정자나무 주변에 흰옷을 입은 수십인지 수백인지의 사람들을 발견했고 즉각 공습명령이 떨어졌다. 그 날 여름 나의 고향 조장 마을에는 미군의 공격으로 살아 남은 자가 단 한 명도 없다. 이후 조장 음달 마을은 객지의 후손들이 터를 닦아 아직도 여름이면 때재사를 지낸다. 맞은편 양달은 대부분 외지(外地)의 군인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우리 가족 또한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이 쪽에서는 농사를 배울 만한 자가 없다. 양달 마을 저수지 옆 산은 임진왜란 때 정기룡 장군의 활약으로 목숨을 구한 조경 장군의 선산인데 그 후손이 살면서 유새했으나 지금은 없다. 저수지 바로 밑에는 선조 때, 유성룡의 후손이 자리 잡았는데 무슨 이유인지 그 집안이 우리를 가장 성심껏 도왔다. 지금 돌이켜 보면, 사실상 우리 집안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나 보이지 않는 역사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마을 가운데는 우물이 있었고 바로 옆이 우리 집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은 마을 가운데 위치하여 마치 감시를 당하는 것 같다. 원래 마을 우물은 지금의 배원 골프장 옆이었다. 당시 다른 사람이 살았던 우리 집터는 입구나 출구가 별도로 없어 아무 곳으로나 다닐 수 있었다. 뒤에 공동 우물이 생기면서 사실상 전용 우물 비슷하게 됐다. 지금 마을 문제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바로 아래있는 집은 순종 임금 때의 궁녀가 내려와 사방에 탱자나무를 심어 놓고 위리안치했다. 얼핏보면 일반 마을 같으나 그 외도 자세히 보면 특이 할 만큼 이유 있는 집들이 우리 집을 빙 둘러 싸고 있다. 좀 억척하자면 이들은 보이지 않게 우리를 괴롭히는 악당들이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살 길이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을 구하지 못했거나 안해 고졸인 교감 선생님이 영어 수업을 대신했다. 교감 선생님은 알파벳도 제대로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수업이 제일 좋다. 친구들에게 확인이 필요 하겠지만 학기 마칠 때까지 영어 교과서를 단 한 페이지도 보지 않았다. 나는 시골에서 9년간 학교를 다녔는데 그 중 가장 유익한 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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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71

직장 생활 중이라 아무에게 말도 못하고 2차를 준비했다. 2차는 서류전형과 면접이라 이력서, 포트폴리오, 자소서 등을 준비해야 한다.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서울대는 전문대학원이 3개가 있다. 보건전문대학원은 연건동에 있고 행정전문대학원은 주말 반으로 야간 비슷하다. 하지만 환경전문대학원은 사실상 주간으로 서울대 유일한 전문대학원으로 볼 수도 있다.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예체능은 1년에 1명 정도의 T/O가 있다. 내가 아는 타대학 예체능계 출신이 서울대학원에 들어간 것은 미대 2명, 환경대학원에 내가 2번째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서울대 개교 이후 모두 4명 정도가 전부다. 얼마나 특이했으면 1년에 십수 명이 어떻게 들어 갔냐며 나를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 교수 중에도 98년쯤 연대 의대 출신이 처음으로 서울대 교수가 됐다고 교내신문에 실릴 정도다. 그만큼 서울대는 밖에서 생각하는 것 보다 더 폐쇄적이다. 우리나라는 대학이 500여개나 되니 이런 학교 하나 정도 있는 것도 좋다고 본다. 대한민국이 사회주의 국가도 아닌데 모두 똑 같을 필요는 없다. 나는 주로 수출을 많이 다루어 해외를 여러 차례 나갔는데 국제사회에서의 서울대학교나 그 출신들의 위상은 국내에서 보다 더 대단하다. 당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송상현 국제사법재판소 소장 등도 서울대 출신이다. 한 번은 미국에서 당해 최고의 의학자 열 몇 명을 언론에 실었는데 그 중 4명이 서울대 출신이다. 물론 이들도 대학원은 하버드와 존스홉키스 출신으로 소개됐다. 최종 합격하고 알았는데 내가 시험 칠 때 서울 미대생 2명이 응시 했지만 모두 영어에서 탈락했다. 그래서 운 좋게 내가 합격했다. 그 친구들이 영어를 잘 했으면 어이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합격 소리에 나교수님이 불러 감사 기도를 했다. 나교수님은 기도하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천성을 보면 기도 할 때 잘 울 것도 같다. 암튼 누군가 내 일에 진심으로 이렇게 감사하는 것은 나교수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심지어 어머니께 서울대학원에 합격했다고 했더니 그런데는 뭣하러 가냐? 돈이나 벌지!했다. 나교수님은 그동안 제자를 여러 명 보냈으나 모두 영어에서 탈락 했다. 아무튼 나를 위해 기도하는 나교수님께 그만 반하고 말았다. 이 때부터 우리 나교수님은 항상 우리 정동배, 우리 정동배 하셨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 좋게 말하려 하면 엄청나게 혼내며 두 번 다시 그런 생각 자체를 못하게 할 정도로 우리 정동배가 됐다. 나교수님은 내가 자랑스러워 호식대를 설립하신 초대 이사장님을 소개 시켜주시기도 하고 현직 이사장님, 그 가족들과 수차례 남원까지 함께 하기도 했다. 사실상 나는 호식대 가족들의 준페밀리쯤 된다. 아마도 내가 요청하면 이사장님은 학과를 만들어서라도 교수자리 정도는 주실 것이다. 지금 만나도 모두 잘해 주실 것을 믿는다. 이쯤이면 다들 내 소식을 궁금해 하실 것이다. 사천 사람들은 뭔가 많이 착각하고 있다. 내가 서울에서 내려간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아서다. 또한 곧 모든 소송이 끝날 것이라는 착각도 있었다. 나교수님은 내가 내려간다는 소리에 현금 백억을 줄 테니 결혼하자고 했다. 우리 나교수님! 그 외에도 유명 연예인과 강남의 부잣집 딸 등 수백억 재력가에서 사위로 받고 싶어했다. 바로 이런 일련의 일들을 감당 할 수가 없어 내려가 스스로를 정리하고 싶었다. 이런 것을 보면 대법원 판결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늠된다. 물론 이는 법학 일반론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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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26

이 일로 특활생 3학년이 2학년들을 전부 도서관 지하실로 불러 줄 빠따를 쳤다. 몇 대를 맞았는지 기억이 없다. 아침부터 선배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고는 계속 때렸고 거의 점심 때가 다 됐다. 그렇게 마무리하고 나오는데 실과주임 선생님이 오토바이 뒤에 야구 방망이를 몇 개 싣고 오더니 운동장으로 집합시켰다. 그 곳에서 또 줄 빠따를 맞고 오후 내내 운동장을 돌리고 해산 시켰다. 미술도장실로 올라가자 이번에는 순이 선생님이 종아리를 때렸다. 사실 나는 해운대 백사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하고 총학생회장이 왜 입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그렇게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맞았다. 이런 일상을 보내는 사람에게 2학년 간부 학생들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나중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해운대고와 맞짱을 뜨기로 하고 백사장 양쪽에 수백 명이 모이자 부산기공 총학생 간부들이 제일 먼저 도망을 가서 나머지 학생들이 해운대고 학생들에게 엄청 맞았단다. 패싸움이 아니라 모였다가 도망가며 일방적으로 맞았다. 그래서 특활생 몇 명이 화가나서 총학생회장을 두들겨 패버렸다는 소문이다. 부산 사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부산기공은 공고지만 해운대고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대충 공부 못하는 애들이 가는 곳이 해운대고 정도로 봤다. 학교 외형만 봐도 해운대고는 부산기공의 수 많은 건물 중 작은 창고 정도에 불과하다. 아마도 그날 사건 이후 해운대고가 부산기공을 앞지르기 시작한 것으로 특이하게 연결된다. 뒤에 언젠가 뉴스를 보니 해운대고생이 수능 만점인가 받아 전국 1등으로 서울법대에 들어간 것을 봤다. 내가 서울에서 내려 갈 때만 해도 부산기공 출신 국회의원이 3명이나 됐다. 이제는 해운대고 출신이 그렇게 될 것이다. 이는 상황이 그랬다는 것이지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갑작스런 폭력에 노출 됐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정도? 지금 나처럼…, 재미 있지? 나는 신체적, 정신적, 물질적, 법적 많은 폭력에 노출 됐고 그래서 자각했다. 나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장담컨대 아직 살아 남지 못 했을 것이다. 이는 목숨의 문제다. 누구는 사람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데 온실 안의 화초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분풀이식 폭력은 안 되겠지만 정당한 체벌은 어느 정도 허용 해야 한다. 세상의 폭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 확실한데 여기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들은 조선의 노비처럼 앞으로도 대대손손 손해보며 살아야 한다. 믿거나 말거나는 자유지만…, 그러니까 폭력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뭐든 많이 가진 자다(주로 권력). 이해를 못하나? 요즘 권력은 가시적이지 않다. 그러니 지뿔도 없으면서 체벌금지니 이런 말에 동요되지 말라는 소리다. 돌이켜 보면, 간부라는 것은 그 책임이기 때문에 그냥 모양만 갖추려면 간부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조직의 모든 것을 알아야 간부라 할 수 있다. 작금의 나라꼴과 비슷하다. 기어올라 거들먹거리는 것만 할 줄 알지 책임지는 놈이 없다. 언젠가 남미에서 경찰과 기념 촬영을 했다. 후진국으로 총질도 자주 일어나는 나라였지만 경찰이 국민을 대하는 것은 우리와 사뭇 달랐다. 경찰 복장도 초록색으로 요즘 우리 정부의 초록 옷과 비슷하다. 그래서 지사 직원에게 ‘경찰옷이 꼭 작업복 같다’고 했더니 그래야 사람들이 폭력이나 위험에 노출 됐을 때 즉각 대응 할 수 있단다. 첨부에 초록 경찰 사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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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71

직장 생활 중이라 아무에게 말도 못하고 2차를 준비했다. 2차는 서류전형과 면접이라 이력서, 포트폴리오, 자소서 등을 준비해야 한다.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서울대는 전문대학원이 3개가 있다. 보건전문대학원은 연건동에 있고 행정전문대학원은 주말 반으로 야간 비슷하다. 하지만 환경전문대학원은 사실상 주간으로 서울대 유일한 전문대학원으로 볼 수도 있다.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예체능은 1년에 1명 정도의 T/O가 있다. 내가 아는 타대학 예체능계 출신이 서울대학원에 들어간 것은 미대 2명, 환경대학원에 내가 2번째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서울대 개교 이후 모두 4명 정도가 전부다. 얼마나 특이했으면 1년에 십수 명이 어떻게 들어 갔냐며 나를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 교수 중에도 98년쯤 연대 의대 출신이 처음으로 서울대 교수가 됐다고 교내신문에 실릴 정도다. 그만큼 서울대는 밖에서 생각하는 것 보다 더 폐쇄적이다. 우리나라는 대학이 500여개나 되니 이런 학교 하나 정도 있는 것도 좋다고 본다. 대한민국이 사회주의 국가도 아닌데 모두 똑 같을 필요는 없다. 나는 주로 수출을 많이 다루어 해외를 여러 차례 나갔는데 국제사회에서의 서울대학교나 그 출신들의 위상은 국내에서 보다 더 대단하다. 당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송상현 국제사법재판소 소장 등도 서울대 출신이다. 한 번은 미국에서 당해 최고의 의학자 열 몇 명을 언론에 실었는데 그 중 4명이 서울대 출신이다. 물론 이들도 대학원은 하버드와 존스홉키스 출신으로 소개됐다. 최종 합격하고 알았는데 내가 시험 칠 때 서울 미대생 2명이 응시 했지만 모두 영어에서 탈락했다. 그래서 운 좋게 내가 합격했다. 그 친구들이 영어를 잘 했으면 어이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합격 소리에 나교수님이 불러 감사 기도를 했다. 나교수님은 기도하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천성을 보면 기도 할 때 잘 울 것도 같다. 암튼 누군가 내 일에 진심으로 이렇게 감사하는 것은 나교수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심지어 어머니께 서울대학원에 합격했다고 했더니 그런데는 뭣하러 가냐? 돈이나 벌지!했다. 나교수님은 그동안 제자를 여러 명 보냈으나 모두 영어에서 탈락 했다. 아무튼 나를 위해 기도하는 나교수님께 그만 반하고 말았다. 이 때부터 우리 나교수님은 항상 우리 정동배, 우리 정동배 하셨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 좋게 말하려 하면 엄청나게 혼내며 두 번 다시 그런 생각 자체를 못하게 할 정도로 우리 정동배가 됐다. 나교수님은 내가 자랑스러워 호식대를 설립하신 초대 이사장님을 소개 시켜주시기도 하고 현직 이사장님, 그 가족들과 수차례 남원까지 함께 하기도 했다. 사실상 나는 호식대 가족들의 준페밀리쯤 된다. 아마도 내가 요청하면 이사장님은 학과를 만들어서라도 교수자리 정도는 주실 것이다. 지금 만나도 모두 잘해 주실 것을 믿는다. 이쯤이면 다들 내 소식을 궁금해 하실 것이다. 사천 사람들은 뭔가 많이 착각하고 있다. 내가 서울에서 내려간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아서다. 또한 곧 모든 소송이 끝날 것이라는 착각도 있었다. 나교수님은 내가 내려간다는 소리에 현금 백억을 줄 테니 결혼하자고 했다. 우리 나교수님! 그 외에도 유명 연예인과 강남의 부잣집 딸 등 수백억 재력가에서 사위로 받고 싶어했다. 바로 이런 일련의 일들을 감당 할 수가 없어 내려가 스스로를 정리하고 싶었다. 이런 것을 보면 대법원 판결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늠된다. 물론 이는 법학 일반론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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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26

이 일로 특활생 3학년이 2학년들을 전부 도서관 지하실로 불러 줄 빠따를 쳤다. 몇 대를 맞았는지 기억이 없다. 아침부터 선배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고는 계속 때렸고 거의 점심 때가 다 됐다. 그렇게 마무리하고 나오는데 실과주임 선생님이 오토바이 뒤에 야구 방망이를 몇 개 싣고 오더니 운동장으로 집합시켰다. 그 곳에서 또 줄 빠따를 맞고 오후 내내 운동장을 돌리고 해산 시켰다. 미술도장실로 올라가자 이번에는 순이 선생님이 종아리를 때렸다. 사실 나는 해운대 백사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하고 총학생회장이 왜 입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그렇게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맞았다. 이런 일상을 보내는 사람에게 2학년 간부 학생들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나중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해운대고와 맞짱을 뜨기로 하고 백사장 양쪽에 수백 명이 모이자 부산기공 총학생 간부들이 제일 먼저 도망을 가서 나머지 학생들이 해운대고 학생들에게 엄청 맞았단다. 패싸움이 아니라 모였다가 도망가며 일방적으로 맞았다. 그래서 특활생 몇 명이 화가나서 총학생회장을 두들겨 패버렸다는 소문이다. 부산 사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부산기공은 공고지만 해운대고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대충 공부 못하는 애들이 가는 곳이 해운대고 정도로 봤다. 학교 외형만 봐도 해운대고는 부산기공의 수 많은 건물 중 작은 창고 정도에 불과하다. 아마도 그날 사건 이후 해운대고가 부산기공을 앞지르기 시작한 것으로 특이하게 연결된다. 뒤에 언젠가 뉴스를 보니 해운대고생이 수능 만점인가 받아 전국 1등으로 서울법대에 들어간 것을 봤다. 내가 서울에서 내려 갈 때만 해도 부산기공 출신 국회의원이 3명이나 됐다. 이제는 해운대고 출신이 그렇게 될 것이다. 이는 상황이 그랬다는 것이지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갑작스런 폭력에 노출 됐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정도? 지금 나처럼…, 재미 있지? 나는 신체적, 정신적, 물질적, 법적 많은 폭력에 노출 됐고 그래서 자각했다. 나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장담컨대 아직 살아 남지 못 했을 것이다. 이는 목숨의 문제다. 누구는 사람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데 온실 안의 화초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분풀이식 폭력은 안 되겠지만 정당한 체벌은 어느 정도 허용 해야 한다. 세상의 폭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 확실한데 여기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들은 조선의 노비처럼 앞으로도 대대손손 손해보며 살아야 한다. 믿거나 말거나는 자유지만…, 그러니까 폭력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뭐든 많이 가진 자다(주로 권력). 이해를 못하나? 요즘 권력은 가시적이지 않다. 그러니 지뿔도 없으면서 체벌금지니 이런 말에 동요되지 말라는 소리다. 돌이켜 보면, 간부라는 것은 그 책임이기 때문에 그냥 모양만 갖추려면 간부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조직의 모든 것을 알아야 간부라 할 수 있다. 작금의 나라꼴과 비슷하다. 기어올라 거들먹거리는 것만 할 줄 알지 책임지는 놈이 없다. 언젠가 남미에서 경찰과 기념 촬영을 했다. 후진국으로 총질도 자주 일어나는 나라였지만 경찰이 국민을 대하는 것은 우리와 사뭇 달랐다. 경찰 복장도 초록색으로 요즘 우리 정부의 초록 옷과 비슷하다. 그래서 지사 직원에게 ‘경찰옷이 꼭 작업복 같다’고 했더니 그래야 사람들이 폭력이나 위험에 노출 됐을 때 즉각 대응 할 수 있단다. 첨부에 초록 경찰 사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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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26

이 일로 특활생 3학년이 2학년들을 전부 도서관 지하실로 불러 줄 빠따를 쳤다. 몇 대를 맞았는지 기억이 없다. 아침부터 선배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고는 계속 때렸고 거의 점심 때가 다 됐다. 그렇게 마무리하고 나오는데 실과주임 선생님이 오토바이 뒤에 야구 방망이를 몇 개 싣고 오더니 운동장으로 집합시켰다. 그 곳에서 또 줄 빠따를 맞고 오후 내내 운동장을 돌리고 해산 시켰다. 미술도장실로 올라가자 이번에는 순이 선생님이 종아리를 때렸다. 사실 나는 해운대 백사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하고 총학생회장이 왜 입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그렇게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맞았다. 이런 일상을 보내는 사람에게 2학년 간부 학생들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나중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해운대고와 맞짱을 뜨기로 하고 백사장 양쪽에 수백 명이 모이자 부산기공 총학생 간부들이 제일 먼저 도망을 가서 나머지 학생들이 해운대고 학생들에게 엄청 맞았단다. 패싸움이 아니라 모였다가 도망가며 일방적으로 맞았다. 그래서 특활생 몇 명이 화가나서 총학생회장을 두들겨 패버렸다는 소문이다. 부산 사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부산기공은 공고지만 해운대고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대충 공부 못하는 애들이 가는 곳이 해운대고 정도로 봤다. 학교 외형만 봐도 해운대고는 부산기공의 수 많은 건물 중 작은 창고 정도에 불과하다. 아마도 그날 사건 이후 해운대고가 부산기공을 앞지르기 시작한 것으로 특이하게 연결된다. 뒤에 언젠가 뉴스를 보니 해운대고생이 수능 만점인가 받아 전국 1등으로 서울법대에 들어간 것을 봤다. 내가 서울에서 내려 갈 때만 해도 부산기공 출신 국회의원이 3명이나 됐다. 이제는 해운대고 출신이 그렇게 될 것이다. 이는 상황이 그랬다는 것이지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갑작스런 폭력에 노출 됐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정도? 지금 나처럼…, 재미 있지? 나는 신체적, 정신적, 물질적, 법적 많은 폭력에 노출 됐고 그래서 자각했다. 나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장담컨대 아직 살아 남지 못 했을 것이다. 이는 목숨의 문제다. 누구는 사람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데 온실 안의 화초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분풀이식 폭력은 안 되겠지만 정당한 체벌은 어느 정도 허용 해야 한다. 세상의 폭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 확실한데 여기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들은 조선의 노비처럼 앞으로도 대대손손 손해보며 살아야 한다. 믿거나 말거나는 자유지만…, 그러니까 폭력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뭐든 많이 가진 자다(주로 권력). 이해를 못하나? 요즘 권력은 가시적이지 않다. 그러니 지뿔도 없으면서 체벌금지니 이런 말에 동요되지 말라는 소리다. 돌이켜 보면, 간부라는 것은 그 책임이기 때문에 그냥 모양만 갖추려면 간부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조직의 모든 것을 알아야 간부라 할 수 있다. 작금의 나라꼴과 비슷하다. 기어올라 거들먹거리는 것만 할 줄 알지 책임지는 놈이 없다. 언젠가 남미에서 경찰과 기념 촬영을 했다. 후진국으로 총질도 자주 일어나는 나라였지만 경찰이 국민을 대하는 것은 우리와 사뭇 달랐다. 경찰 복장도 초록색으로 요즘 우리 정부의 초록 옷과 비슷하다. 그래서 지사 직원에게 ‘경찰옷이 꼭 작업복 같다’고 했더니 그래야 사람들이 폭력이나 위험에 노출 됐을 때 즉각 대응 할 수 있단다. 첨부에 초록 경찰 사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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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26

이 일로 특활생 3학년이 2학년들을 전부 도서관 지하실로 불러 줄 빠따를 쳤다. 몇 대를 맞았는지 기억이 없다. 아침부터 선배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고는 계속 때렸고 거의 점심 때가 다 됐다. 그렇게 마무리하고 나오는데 실과주임 선생님이 오토바이 뒤에 야구 방망이를 몇 개 싣고 오더니 운동장으로 집합시켰다. 그 곳에서 또 줄 빠따를 맞고 오후 내내 운동장을 돌리고 해산 시켰다. 미술도장실로 올라가자 이번에는 순이 선생님이 종아리를 때렸다. 사실 나는 해운대 백사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하고 총학생회장이 왜 입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그렇게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맞았다. 이런 일상을 보내는 사람에게 2학년 간부 학생들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나중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해운대고와 맞짱을 뜨기로 하고 백사장 양쪽에 수백 명이 모이자 부산기공 총학생 간부들이 제일 먼저 도망을 가서 나머지 학생들이 해운대고 학생들에게 엄청 맞았단다. 패싸움이 아니라 모였다가 도망가며 일방적으로 맞았다. 그래서 특활생 몇 명이 화가나서 총학생회장을 두들겨 패버렸다는 소문이다. 부산 사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부산기공은 공고지만 해운대고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대충 공부 못하는 애들이 가는 곳이 해운대고 정도로 봤다. 학교 외형만 봐도 해운대고는 부산기공의 수 많은 건물 중 작은 창고 정도에 불과하다. 아마도 그날 사건 이후 해운대고가 부산기공을 앞지르기 시작한 것으로 특이하게 연결된다. 뒤에 언젠가 뉴스를 보니 해운대고생이 수능 만점인가 받아 전국 1등으로 서울법대에 들어간 것을 봤다. 내가 서울에서 내려 갈 때만 해도 부산기공 출신 국회의원이 3명이나 됐다. 이제는 해운대고 출신이 그렇게 될 것이다. 이는 상황이 그랬다는 것이지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갑작스런 폭력에 노출 됐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정도? 지금 나처럼…, 재미 있지? 나는 신체적, 정신적, 물질적, 법적 많은 폭력에 노출 됐고 그래서 자각했다. 나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장담컨대 아직 살아 남지 못 했을 것이다. 이는 목숨의 문제다. 누구는 사람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데 온실 안의 화초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분풀이식 폭력은 안 되겠지만 정당한 체벌은 어느 정도 허용 해야 한다. 세상의 폭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 확실한데 여기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들은 조선의 노비처럼 앞으로도 대대손손 손해보며 살아야 한다. 믿거나 말거나는 자유지만…, 그러니까 폭력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뭐든 많이 가진 자다(주로 권력). 이해를 못하나? 요즘 권력은 가시적이지 않다. 그러니 지뿔도 없으면서 체벌금지니 이런 말에 동요되지 말라는 소리다. 돌이켜 보면, 간부라는 것은 그 책임이기 때문에 그냥 모양만 갖추려면 간부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조직의 모든 것을 알아야 간부라 할 수 있다. 작금의 나라꼴과 비슷하다. 기어올라 거들먹거리는 것만 할 줄 알지 책임지는 놈이 없다. 언젠가 남미에서 경찰과 기념 촬영을 했다. 후진국으로 총질도 자주 일어나는 나라였지만 경찰이 국민을 대하는 것은 우리와 사뭇 달랐다. 경찰 복장도 초록색으로 요즘 우리 정부의 초록 옷과 비슷하다. 그래서 지사 직원에게 ‘경찰옷이 꼭 작업복 같다’고 했더니 그래야 사람들이 폭력이나 위험에 노출 됐을 때 즉각 대응 할 수 있단다. 첨부에 초록 경찰 사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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